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인생에 대한 소중한 유산과 대학시절 은사의 배려 덕분에 경험한 아르바이트, 그리고 군대에서 배운 리더십의 중요성과 경영관리, 사업의 기초 체력을 다진 비료공장에서의 현장 체험, 외국계 회사에서 터득한 냉혹한 기업 현실….
1961~1966. 김용호 회장 군대 생활
1961.03 김용호 회장 대학 졸업식
김용호 회장의 직장 생활
젊은 시절 축적한 경험과 노하우는 창업을 위한 일련의 과정이었다. 김용호 회장은 지난 시간을 바탕으로 직장 선배와 함께 냉난방설비 시공을 핵심
사업으로 삼은 삼진설비를 설립했다. 삼진설비는 책임감 있는 현장 작업과 신속한 업무 처리 등으로 설립 초기부터 호황을 누렸다.
그렇다고 마음까지 흡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통 엔지니어의 길을 걸어온 김 회장으로서는 제조업에 대한 갈증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평소 꿈에
그리던 탄탄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우수한 제품을 생산하는 제조 회사의 설립을 준비했다. 삼진설비를 경영하며 모아뒀던 자금에 새로운 사업을
함께할 동료들과 힘을 합쳐 도전의 길에 나섰다.
김용호 회장이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제품은 냉난방 온도 조절 센서인 벨로우즈(Bellows)였다. 그동안 벨로우즈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데다 기술력만 확보한다면 적은 자본으로 부품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벨로우즈 국산화가 이뤄지지 않아 참고서적이나 기술적 조언을 구할 데가 전무했던 것이 문제였다. 미국이나 일본의 관련 서적을 구하고 밤을 새워 벨로우즈 제조기술을 하나씩 체득했다.
벨로우즈
연구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정부의 연구기관이나 기업조차 수년 동안 시제품 제작에 실패한 벨로우즈의 기본 설계에 성공했다. 젊은 엔지니어의 집념과 의지가 빛을 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벨로우즈의 성공스토리는 그렇게 서막을 올렸다.
1970년대 중요한 부품은 일본이나 미국에서 사다가 쓰는 게 너무 당연했다.
우리의 기술로 우리의 제품을 만들 포부를 품었다. 모든 산업 분야에 반드시 필요한 제품인 벨로우즈가 제격이라고 판단했다.
벨로우즈만큼은 우리가 세계 최고란 소리를 듣고 싶었다.
이룰 성(成)과 나아갈 진(進)을 합쳐 반드시 이뤄 나간다는 의미를 담은 사명이었다. SJM의 전신인 성진기공은 기계공업을 위주로 부품을 제작하는 사업으로 출발했다. 성수동에 첫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10명도 채 되지 않는 소수정예의 직원으로 부품업계에 뛰어들었다. 국내 벨로우즈 사관학교이자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지향하는 강소기업으로 뛰어오르기 위해 성수공장의 불을 밝혔다.
1975~1990. 성진기공 CI
초창기 성진기공 야유회
초창기 직원 월급 봉투
창립 초기에는 설비시공으로 사세를 확장하고 본격적인 부품 개발과 생산을 준비했다. 설립 초기부터 인청동 벨로우즈의 양산체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뒤 건축용과 산업용 익스팬션 조인트(Expansion Joint)를 시장에 내놓았다. 이후 신제품을 속속 선보이며 부품업계에 안착했다. 특히
벨로우즈를 모체로 한 제품을 국산화하면서 국가경제 발전에 일조했다.
건축용 익스펜션 조인트
회사의 급속한 성장에 따라 성수공장의 규모로는 공급 물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마침 정부도 수도권의 규제 강화와 전문 산업단지 건설의 일환으로
반월공단을 조성했다. 김용호 회장은 회사를 도약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반월공단 입주를 결행했다. 김 회장은 물론 직원들 모두
한 몸이 되어 새로운 일터를 가꿔나갔다. 반월공단 시대의 개막은 제2의 창업이나 마찬가지였고,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1979. 반월공장 준공
1980.01.19. 성진기공 신축공장 준공식
목표를 세우고
반드시 이뤄 나간
‘성진’
소리 없이 강한 중소기업으로 발돋움
반월공장 가동 직후 생산조직과 자체 기술력을 강화하며 양산체제 구축에 정열을 쏟았다. 그 결과 1979년 자동성형 기술을 확보한 데 이어 대량 생산체계를 갖출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임직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구슬땀을 흘리며 자체 기술개발과 제품 생산에 몰입했다. 국내
대기업과 선박용, 산업용 부품의 공급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것도 구성원의 열정 덕분이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며
수출의 실마리를 풀었다.
해외시장 진출의 물길을 연 것은 주요 선진국의 선급협회로부터 선박용 익스펜션 조인트의 인증을 취득한 이후였다. 세계 각국의 선급협회로부터
제품력은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글로벌 스탠더드 기준을 충족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를 기반으로 세계시장에서 회사의 이름을 알리고 제품을
홍보하는 기회로 삼았다.
1980년대 들어 선박용 제품의 본격적인 생산과 동시에 다양한 상품 라인업을 구성했다. 제품의 다양화는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더욱 성장할 수 있는 도약대로 작용했다. 기술 축적과 우수한 제품의 개발, 매출액 증대와 기업 가치 제고 등의 선순환 구조를 완성하는
퍼즐이었다.
1980년대 반월공장 벨로우즈 생산 과정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제품의 개발을 통해 국내 대기업과 잇따라 공급계약을 맺었다. 포항제철, 삼성중공업, 쌍용중공업, 현대그룹 등과 끈끈한
파트너십 관계를 맺었고, 주요 대기업들로부터 기술력과 제품력을 인정받아 우수 협력업체나 국산화업체로 선정됐다. 이와 함께 특허를 출원하거나 실용신안 등을 등록해 뛰어난 기술력을 공인받았다.
1980년 초반 이후에는 자체 기술개발로 여러 품목을 국산화하는 데 인적 물적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여느 중소기업과는 달리 제품의 연구와 개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원천 기술 확보에 사활을 걸다시피 했다. 1983년 말에는 ‘작지만 강한 기업’으로 발돋움하며 거의 모든 분야에서 벨로우즈를
자체 제작할 수 있는 기술과 환경을 보유하게 됐다.